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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 11. 23. 18:35
작성자
AP.KENY

'스네어갈러프의 씨주머니를 따서 즙을 짜오는 것이 이번 과제다.'

언제나 살아있는 식물과 관련된 과제를 했다 하면 죽이고 말았던 과거를 떠올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지막 과제마저 식물을 죽이고 싶진 않아 리포트로 대체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마지막 과제가 되어버린 지금. 감히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온실에 발을 들였다. 그리도 좋아하신다던 스네어갈러프가 온실 중앙에 놓여있다. 다가가면 덩굴이 뻗어 나오겠지. 프로테고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씨주머니를 꺼내야 하는데-

'난 이 식물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라-'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도 좋아하신다던 식물을 죽여버릴까 봐. 언제나 교수님의 식물을 망친 주제에 새삼스러운 매우 좋아한다는 그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려서. 씨주머니를 꺼낼 수가 없었다. 어쩜 이리 바보 같은지! 하늘에서 교수님이 비웃고 계시진 않을까.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결국 스네어갈러프를 바라만 보다 온실을 벗어났다. 정확하게는 도망쳤다 말하는 게 옳다. 앞으로 식물을 두 번 다신 키우지 못하게 되겠다는 어렴풋한 직감만 남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평화로운 하늘을 봤다. 온실 앞에 자리를 틀고 앉아 고민을 시작했다. 씨주머니의 즙을 대신하려던 양피지는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것과 빈 병만 제출해도 과제로 인정해 주셨겠지만... 오늘따라 감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든다. 막연한 '그러지 않고 싶다'라는 감정. 어차피 어제부로 자신은 교칙도 어기는 못난 반장이 되었다. 그럼 돌아올 수 없게 된 교수님께 마지막 즐거움이라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감실 카인 교수님 책상 위에 양피지 다섯 뭉치와 초록 즙이 든 약병을 하나 올려뒀다. 콘푼도를 걸어 스네어갈레프 즙인척하는 평범한 녹차다. 혼내시려면 다시 돌아와 잔소리를 해보시라지! 그러게 누가 벤투스로 유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랬나? 다 교수님 잘못이다.

아무도 없는 사감실에서 홀로 웃고, 자책하고, 슬퍼하고. 또 화도 내고. 다시 슬퍼하길 수십 분.

"슬슬 정말 가봐야겠네요. 늘 감사했습니다, 카인 교수님. 당신을 존경하고 또 좋아했어요... 부디 푹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사감실을 떠났다.